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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각국 정상들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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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돌프 히틀러]] == ||[[파일:external/36.media.tumblr.com/tumblr_muglpk02da1rwjpnyo1_500.jpg|width=100%]]|| || [[독소 불가침조약]][* "신혼 생활이 얼마나 오래 갈지 궁금한가?" 1939년에 미국의 신문사 워싱턴 스타에서 출판한 만평이다.]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202fef11435b31cd36722047d81bab2c.jpg|width=100%]]|| || [[바르바로사 작전]][* 히틀러: "용서하시게 동지. 놓치긴 너무 아까운 기회인걸 어쩌겠나?". 스탈린이 떨어트리는 문서는 독소 불가침조약이다. 영미권에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와 비슷한 의미로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걸 등에 칼을 꽂는다라고 말한다. 1941년 6월 23일 영국 데일리 메일에서 출판한 만평으로, 바르바로사 작전 바로 다음날에 출판된거다.] || ||[[파일:external/lh3.googleusercontent.com/ww2-cartoons-illingworth-stalin-spanks-hitler.jpg|width=100%]]|| || [[바그라티온 작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합동 공세라는 몽둥이를 들고) : "[[노르망디 상륙 작전|눈물 좀 아끼라고,]] [[아돌프 히틀러|아돌프]], [[팔레즈 포위전|그건 그냥 맛보기니까 말이야.]]". 히틀러 : ([[바그라티온 작전|스탈린에게 얻어터지며]]) "[[적반하장|아악! 이 살인마야! 아악!!]]"] || 당대 [[공산주의]]의 정신적 본산인 소련의 최고 권력자 [[이오시프 스탈린]]과 공산주의의 무조건적인 척결을 외치는 [[파시즘]]의 지도자인 [[아돌프 히틀러]]는 사상적으로 양립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게다가 히틀러는 동유럽의 주류 민족인 슬라브인을 유대인과 동급의 열등인종 취급하기도 했다. 물론 처음에는 스탈린 또한 히틀러를 과소평가했던 것은 마찬가지라서 결국 [[독일 공산당]]과 [[독일 사회민주당]]이 [[나치당]]의 세가 커지고 있는데도 [[인민전선|단일대오]]를 짜는데 실패하는 계기를 마련했는데 히틀러가 일개 군소정당 리더에서 반대파를 축출하며 총통이 되는 과정을 보면서, 스탈린은 히틀러를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는 서구권 국가들이 소련의 대(對) 독일 안보동맹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상황에서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지만, 이는 불과 몇 년도 지나지 않아 '[[바르바로사 작전|화려하게 뒷통수를 맞으며]] [[독소전쟁|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만 20세기를 상징하는 최악의 독재자들답게 통치 기술 독재기술에서는 서로 상당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스탈린의 [[대숙청]]은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벌인 두 차례의 숙청에 다소 영향을 받았으며, 히틀러 역시 [[프로이센 왕국]]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독립적이었던 군부를 통제하는 데 스탈린의 방식을 상당수 차용했다. 심지어 히틀러는 소련을 정복한 뒤 유럽 러시아 영토를 관리할 적임자로 스탈린을 꼽기도 했다. [[이언 커쇼]] 등은 히틀러가 스탈린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히틀러의 사상에 따르면 슬라브인은 모래알같이 미개한 민족들이라서 자기들끼리 모여 국가를 이룰 수 없는데 스탈린은 비록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방법을 쓰긴 했어도 슬라브인들을 규합하여 현대국가같은 것은 건설하긴 했으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간의 범주라는 것(...). 전쟁 후반기에 가서 계속된 패전과 점점 목이 더욱 조여지는 상황에 맛이 간 히틀러는 고참 지휘관들이 자기와 계속 의견충돌을 빚자, 측근들에게 "나는 정말 스탈린이 부럽다. 그 사람은 정말 자기 뜻대로 군을 좌지우지하잖나. 나도 머리가 굳어버린 군윗대가리들을 스탈린처럼 모조리 쓸어버렸어야 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말하기도 했고,[* 그 유명한 히틀러 관련 영화인 몰락에서도 이와 같은 대사가 나온다.] 정적의 정치적 생명과 명예를 극한까지 말살하는 모스크바 재판에 아주 큰 감명을 받아 "우리에게도 비신스키가 필요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1944년 히틀러 암살 음모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는 정말 스탈린 방식[* 쥐도새도 모르게 체포, 고문으로 거짓진술, 연출된 간략한 공개재판, 판결즉시 처형.]으로 군부 숙청을 단행했는데 이때 모스크바식으로 피고인들을 조진 인물이 전직 공산당원인 [[롤란트 프라이슬러]]였다. 반면 스탈린은 히틀러의 [[에른스트 룀]]과 SA 상층부의 숙청사건([[장검의 밤]])을 보고, [[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 "봤지, 히틀러 그 친구 참 멋지게 해치웠군"이라고 역으로 이념이고 나발이고 신경쓰지 않고 깡패식으로 백주대낮에 정적들을 린치해서 죽이는 스타일에 감명을 받았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서로 라이벌이었고 행적도 비슷했기 때문에 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스탈린은 붉은 파쇼라는 비난을 받았고, 히틀러도 집권 이전에는 나치당만의 독특한 사회주의 이념 때문에 보수우익에게는 극좌파로, 공산당 같은 극좌익에서는 정신나간 민족주의 극우로 조롱을 받았다. 냉전 이후에는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 등이 주도하여 히틀러와 스탈린을 폭압적인 일당 경찰독재국가라는 본질적으로 같은 국가로 분류하면서 두 독재자는 서로를 미워하지만 결국 서로랑 똑같았던 자들로 분류되곤 했다. 다만 이러한 전체주의 이론은 냉전 때 소련을 적성국으로 지정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움직임의 영향을 받았고 또한 나치에 협력했던 독일 보수 세력이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옹호하려는 성격도 있었기에 현재는 예전처럼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그리고 둘이 취한 수단의 유사성은 있어도 체제의 본질은 달랐으며 둘의 개인적인 성격 또한 완전히 달랐다. 일단 학력도 변변찮고 스스로 체계적인 사상을 만들지도 못했던 히틀러와 달리[* 흔히들 [[파시즘]]의 창시자가 히틀러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파시즘을 이념화하고 체계적인 기틀을 세운 것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스탈린은 그 자신이 소수민족 문제의 전문가였으며 [[스탈린주의|독자적인 사상]]까지도 창안할 수 있었을 정도로 두뇌가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통치 기술 면에 있어서는 스탈린이 히틀러보다 훨씬 치밀했다. 일반 행정만 봐도, 스탈린은 스스로 세부사항까지 완전히 장악하고 챙긴 반면, 히틀러는 기본적으로 행정에 일자무식이라 2인자들인 [[괴링]], [[괴벨스]], [[힘러]], [[보어만]] 같은 자신의 부하에게 행정을 방치해 가뜩이나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갑자기 전쟁에 뛰어든 독일의 여러 문제점을 증폭했다.[* 이 때문에 히틀러의 명령을 행정기관에 하달하던 [[마르틴 보어만]]이 실질적인 독일의 통치자였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또한 스탈린은 절대로 2인자를 허용하지 않는 성격이어서 당내 자신의 반대파들을 제압한 뒤 대숙청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철저한 관료제 독재체제를 구축하여 자신의 의사를 정책의 세부사항에까지 치밀하게 적용했다. 또 둘의 차이는 전쟁 측면에서도 나타나는데, 히틀러가 배짱으로 정면돌파를 지르고 보는 성향이 강했다면,[* 전쟁 시절을 빼고, 주데텐란트를 합병한 건이나 [[안슐루스]], [[폴란드 침공]]만 봐도 히틀러가 얼마나 정세에 모험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전간기에 히틀러가 이웃 국가를 상대로 했던 것 중 그 어느것도 정상적인 회담을 거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오직 대공황의 여파로 일어난 초인플레이션, 그에 따라 불거진 전쟁 배상금 지불 문제에 대한 프랑스와 영국의 심리를 절묘하게 이용해 베르사유 조약 폐기, 재군비 선언 등 도박에 가까울 정도로 아슬아슬한 형국을 이어갔고, 결국 폴란드 침공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인내심을 건드려, 아직 전쟁 준비도 덜 된 상태에서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스탈린은 그야말로 철두철미한 타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만사를 철저하게 계산하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사례는 많은데 [[독소전쟁]] 초기의 독일을 자극하지 말라고 명령했다든가, [[미국]]의 경고에 [[홋카이도]] 반분 계획을 물렸다거나, [[6.25 전쟁|한국 전쟁]]을 허락 받으러 온 [[김일성]]을 48차례나 내쫓고 한국전쟁 개입조차도 최대한 미국을 자극하지 않는 쪽으로 간접적으로 수행했다.[* 물론 눈가리고 아웅 식으로 전쟁협조를 했기는 했지만 중국처럼 대대적으로 군대를 내보낸 수준은 아니었다. 당장 소련이 전쟁으로 인구의 15%, 그것도 대부분 전후복구에 꼭 필요한 20~40대 남성들의 상당수를 손실한 상태에서 동유럽 각 국가들에 상당수의 군대를 파견보낸 데다가, 전후복구작업으로 막대한 인력수요가 발생했기 때문에 북한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중공 정권에 북한 문제를 외주로 맡겼다. 미국 역시 다 알고 있었지만 2차 대전이 끝나고 겨우 몇 년밖에 안 지난 상황이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 동맹국도 소련과 상황이 크게 달랐던 건 아닌지라 세계 대전으로 번지기 싫어서 대충 눈감았다.] 여담으로 스탈린과 히틀러가 직접 만난 적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을 당시에도 없었으나 한때 같은 도시에 머문 적은 있었다. 1913년 [[빈(오스트리아)|빈]]에서 스탈린이 기거할 때 히틀러도 거기 있었던 것. 심지어 그때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티토]], [[트로츠키]]도 빈에 살았다.[* 물론 이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는 아니고, 20세기 초반의 빈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로써 당대 유럽 정치, 사회, 문화의 중심지이자 일종의 [[국제도시]]로 기능하고 있었으며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등 당시에는 불온하게 여겨지던 사상들에 대해서도 '명목상으로는 엄금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심하게 탄압하지 않고 느슨하게 집행하는' 소위 '슐람페라이'(schlamperei)적 관행을 가지고 있었기에 각국의 사상가나 정치활동가, 특히 망명객들이 많이 머무르는 도시였던 것이다. 히틀러가 모국인 오스트리아를 떠나 독일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 자체가 지독한 국수주의자였던 히틀러로써는 오스트리아와 빈의 이러한 '국제주의적'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 둘 다 [[막장]] [[아버지]]의 영향으로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고 인간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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